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약진 운동 (문단 편집) == 이후 == 대기근으로 대약진운동은 철회되고,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[[중국공산당]] 내부가 분열하기 시작했다. [[마오쩌둥]]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한 [[류사오치]]는 [[덩샤오핑]]과 함께 대대적인 정돈 사업에 들어갔고, 1961년도에 경제성장률이 '''마이너스 27%'''를 기록할 정도로 파탄상태에 접어든 [[중국/경제|중국의 경제]]를 다시 성장 기조로 돌려놓는데 성공하여 1963년부터 1966년도까지 4년 연속 2자릿수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고 "대약진 운동은 인재(人災)가 7할, 천재(天災)가 3할이었다."고 말하면서 국가 정책의 실패로 규정했다. [[마오쩌둥]]은 이에 대해 격렬히 반발했지만, [[류사오치]]는 마오쩌둥의 면전에 대고 '''"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, 역사책에는 식인행위도 기록될 것"'''이라는 폭언까지 퍼부었다. 마오쩌둥은 이에 류사오치와 [[덩샤오핑]]이 [[자본주의]] 노선을 추구하는 주자파라고 의심하게 되었고, 가뜩이나 자신의 [[중2병|'''멋진''']] [[반어법|'''계획''']]을 비판하던 지식인들에 대한 불만이 쌓여, 결국 '''[[문화대혁명]]'''이라는,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을 터뜨리게 된다. 이렇게 대약진운동은 [[1960년대]] 들어 진정되었으나, 근본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. 이로 인해 1960~[[1970년대]] 중국은 마오쩌둥이 사망하는 [[1976년]]까지 식량 부족을 겨우겨우 넘겨가면서 기근을 피해야 했다. 1962년을 기점으로 기근이 진정된 이후로는 [[중국]]에 큰 기근은 없었으나, 식량은 남아돌지 않아서 [[배급제]]가 철저히 실시되었다. 이 당시에는 하루 3끼 정도를 먹을 수 있는 식량을 [[배급]]하기는 했지만, 배급량이 꽤나 빠듯해서 3끼를 꼬박 먹을 수 있다고 해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. 무엇보다도 배급표 재발행 조건이 까다로워서, 배급표를 깜빡 잊거나 분실할 경우에는 그달 식량은 없는 것이었다. 때문에 이렇게 되면 남에게 밥을 빌어먹거나, 아니면 공산당원에게 아부를 하든가 하는 수를 써야 했다. 그 덕택에 1980년대까지 중국 서민들에게 배급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 물품 중 하나였다. 하지만 1980년대를 기점으로 해서 배급제는 점차 축소되어 나갔고, 1993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. 그리고 식량이 모자라는 부분은 수입하고, 여러 가지 개간사업을 통해 농지를 늘리며, 거기에 위안룽핑이라는 걸출한 농학자가 등장해[*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하이브리드 쌀을 만들어낸 중국의 농학자. 그가 개발한 벼 품종은 중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도입되어 수많은 사람을 먹여살려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선정되었다. 2021년 타계.] 식량생산량을 극적으로 늘리면서 아슬아슬하게 인구증가를 지탱할 수 있었다. [[덩샤오핑]] 이후 대대적인 개혁, 개방이 이뤄진 후에야 식량 부족 사태가 완전히 근절되었으며, [[덩샤오핑]]은 "중국에서 최초로 기근을 없앤 지도자"로 칭송을 받게 되었다. --쓰촨에서 했던 지랄은 깔끔하게 잊어주자-- 여하간 대약진운동이 시행되기 직전의 [[중국/경제|중국의 경제]]상황은 낙관적이라 할 수 있었지만, 대약진운동과 [[문화대혁명]]이 겹치면서 "[[영국]]을 당장에 따라잡을 것"이라고 호언장담했던 것과는 다르게 대약진운동으로 인해서 [[일본]]에 따라잡혔다. 일본을 겨우 다시 따라잡은건 40년 이후였다. 이후로도 문화대혁명과 혼란으로 인해서 [[서독]], [[이탈리아]], [[멕시코]], [[캐나다]], [[브라질]], [[동독]], [[호주]], [[스페인]] 등에 차례차례 따라잡혔다, 결국 1981년에 세계 13위권 경제국가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. 또한 19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중국의 경제력은 중국의 평균적인 성 하나 정도의 인구에도 훨씬 못미치는 [[대만]]의 2배를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했으며 [[홍콩 반환]] 당시에 [[홍콩/경제|홍콩의 경제력]]이 중국 전체의 1/5에 달했을 정도였다. 어쨌든 다시금 경제성장에 전념하면서 이들 국가를 다시 하나하나 따라잡았지만, 2위 경제대국이 된 것은 2010년이 되어서부터의 일이다. 대약진운동과 비슷한 시기인 [[니키타 흐루쇼프]] 집권기 [[소련]]에서도 이와 비슷한 뻘짓이 있었다. 바로 [[처녀지 개간 운동]]. 개요에 조금 언급했듯이 이걸 보고 [[마오쩌둥]]이 자극을 받아서 대약진 운동을 시행한 것이다. 그러나 소련 농지에 맞지 않는 농법과 무리한 수확 할당 등으로 인해 소련의 농업 및 낙농업은 그야말로 박살이 났다. 이 일은 흐루쇼프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키고 이후 그가 실각당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. 그나마 소련 정부는 [[중국]]과는 달리 상황을 받아들이고 [[미국]], [[캐나다]], [[호주]], [[브라질]], [[아르헨티나]] 등 해외에서 대규모로 곡물을 수입해서 중국과 같은 대규모 기근은 발생하지 않았다. 그러나 소련 농업 및 축산업은 집단농장 등 소련 체제 자체의 한계와 맞물려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였고, 소련은 [[소련 해체|체제가 해체]]될 때까지 해외에서 식량을 수입해야 했다. 아무튼 처녀지 개간 사업을 말아먹었다한들 소련은 중국에 비하면 그야말로 최첨단을 달리는 선진국이었다. 이때 생활수준을 보면 [[소련]]은 [[텔레비전]]과 [[세탁기]]가 보급되기 시작하고 고기를 매일같이 먹을 수 있었으며 [[별장]]도 보편화되기 시작한 데 반해서, 당시 [[중국]]은 [[자전거]]와 [[재봉틀]]이 혼수품이었던 시절이었고, 1980년대까지도 고기는 어쩌다 한번 먹는 음식이었다. 때문에 소련으로 망명가는 중국인들도 일부 있었다. 이 사건의 여파가 중국의 고령 계층에서 좋게 포장하자면 일상속의 [[생존주의]]적인 행동으로 나타나 오늘날까지 중국에 피해를 끼치고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